Abstract
요즘은 여러 학문의 통섭(統攝)을 요청하는 시대이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통섭적 전거를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즉 원효(元曉, 617-686)와 정조(正祖, 1752-1800)에 주목하였다. 우선, 원효와 정조 시대에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청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다음으로 그 시대적 요청에 따른 그들의 응답이었던 원효의 화쟁과 정조의 탕평을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맺는 말에서 화쟁(和諍)과 탕평(蕩平)의 가치와 한계를 설명하였다. 본 논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그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일 것이다. 그것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즉 두 가지 모두 혼란과 갈등이 유발되는 논리와 주장들을 조화롭게 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의견들을 단일한 한 가지로 통일시키려 하지 않고 각각의 일리를 인정하며 만사를 아우른다. 화쟁에는 불교의 대승(大乘)적 바탕이, 탕평에는 유가의 대동(大同)적인 바탕이 있음으로 인해, 다양성이 인정되고 다시 그 다양성들이 경쟁하면서도 각 주장들의 논리들은 하나[一]로 그리고 도(道)로 귀일한다. 그들 간에는 근본적으로 불교와 유교라는 큰 차이가 있다. 불교와 유교의 차이만큼 화쟁과 탕평 양자에게도 그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원효 화쟁의 중심축은 일심(一心)이고, 정조 탕평의 중심축은 황극(皇極)이다. 그것들은 각각 불교와 유가에서 근원적 중심축이라는 의미에서 동일성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조의 탕평은 중심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시비를 판단하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이라면, 원효의 화쟁은 개입과 시비판단을 초월한―그것을 하지만 하지 않고 하지 않으나 하는―원융회통이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