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이덕무의 『사소절』과 주자의 『소학』을 비교 검토하여 『사소절』의 위치 및 의의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는 흔히 북학파 실학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일반 실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사회개혁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탈주자학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주자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주자학과 18세기 조선의 실학은 과연 양립 가능한 것일까? 주자는 당시 사상계를 풍미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허학(虛學)’이라 비판하며,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다. 그가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던 이유는 자신의 학문=유학만이 최고의 인간상=성인(聖人)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구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예(禮)였다. 주자가 아동교육을 위해 저술한 『소학』은 ‘세세한 예절’을 그 내용으로 한 것으로, 그는 실제로 이 ‘소절(小節)’의 실천이 성인이 되기 위한 기반이라고 생각하였다. 선비, 여성, 아동을 대상으로 그들의 일상적인 행위규범을 규정한 이덕무의 『사소절』은 흔히 ‘한국판 소학’이라 평가된다. 그런데 ‘한국판 소학’이라는 평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사소절』이 일정부분 『소학』을 계승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단순한 계승이 아니라 ‘한국화’를 수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학』의 무엇을 계승한 것일까? 그리고 또 그가 수행한 한국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덕무는 『예기』「곡례편」의 ‘곡례’를 주공(周公)의 저작으로 간주하는 한편, 『소학』의 내용을 ‘소절’, 즉 곡례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소절’도 “불유한(不踰閑)”이라 주장한 주자의 ‘소절’관을 더욱 강화한 것이며, 아울러 양명 좌파의 사상이 수용, 확대되는 등, 주자학적 이념이 와해되기 시작한 조선 18세기, 당시의 현실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소절’이야말로 현실에 기반을 둔, 가장 실천가능한 수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덕무의 지적처럼, 주자와 이덕무 사이에는 6,7백년의 시차가 존재하였다. 이덕무는 문지기, 고용인, 농부, 상인, 공인과 같은 생산직 종사자나 여성도 사(士), 즉 선비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그들에게 선비로서의 자각을 요구하였다. 실제로 『사소절』의 주된 내용은 바로 그들이 지켜야 행위 규범들이다. 급속히 부상하기 시작한 평민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이덕무가 주자와 자신을 구분하며 『사소절』을 집필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덕무가 주자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사소절』을 집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소절』의 사상적 의의를 밝히는 한편, 『사소절』을 통해 『소학』의 한국적 전개 양상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