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논문은 메이지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궁리(窮理)’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과학사상과 문명론을 살펴본 것이다. ‘궁리’라는 어휘는 일찍이 ‘격물’과 함께 사물의 이치에 대한 탐구를 뜻하는 주자학의 대표적 어휘였다. 그러나 후쿠자와에 의해 이 ‘궁리’ 개념은 물리적 대상세계에 대한 법칙적 탐구로 한정되었다. 즉, 후쿠자와는 ‘궁리’를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 혹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의 뜻으로 사용했고, 그것은 인간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중요한 실용적 학문이라고 보았다. 후쿠자와의 ‘궁리’가 문명 발달의 핵심적인 지식으로 규정된 것은 『학문의 권유』(1872년 초편), 『문명론의 개략』(1875년) 등을 통해서였다. 후쿠자와는 인류의 문명이란 애당초 ‘미개’, ‘반개’, ‘문명’이라는 3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아울러 당시 문명의 발달에서 가장 앞선 것은 서양문명으로, 그 근저에는 바로 궁리(궁리학)에 대한 탐구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동시에 후쿠자와에게 있어 문명이란 국가의 독립이 없이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후쿠자와의 문명론에 놓인 이 같은 문명=국가의 논리는 1881년 『시사소언』의 집필 이후, 일본의 독립에 대한 위기감이 심화될수록, 후쿠자와의 문명론을 국가론 속에 매몰시켜간 요인이었다. 즉, 후쿠자와는 일본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주변국인 중국, 조선을 문명의 세계로 이끌 필요가 있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위력의 사용 또한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같은 문명론의 국가주의적 경도는 일찍이 후쿠자와 스스로가 문명 발달의 핵심적 지식으로서 인간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학문으로 이해했던 ‘궁리’를 국가적 산업, 즉 식산을 위한 학문으로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즉, 후쿠자와에게 있어 문명의 발달이 국가 독립의 수단으로 인식되어갈 때, 문명 발달의 중요한 척도였던 궁리(물리)도 국가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후쿠자와의 궁리(물리) 이해는 메이지 계몽사상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줌과 동시에,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일본의 ‘국가적 과학’의 모습을 미리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