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아트만(ātman)과 힌두 전통에서 윤회의 주체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반면 푸루샤(puruṣa)는 상키야-요가 학파에서 아트만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영아(靈我)ㆍ순수정신 등으로 번역된다. 아트만과 푸루샤는 상키야 학파 내외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상키야 학파가 힌두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아트만이라는 용어 대신에 푸루샤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경위를 소묘하는 데 있다. 특히 명상을 통해 지각되는 대상으로서의 아트만과 푸루샤의 묘사하는 서술들에 맞추었다. 아트만과 푸루샤가 명상의 대상으로 취급되면서 중요한 분기점을 맞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초기 우파니샤드에서는 심장의 빛을 아트만이라고 간주하는 계열이 있으며, 그 개념이 고전 요가 체계에도 통용되고 있다. 푸루샤와 아트만은 우파니샤드에서 서로 다른 개념으로도, 동일한 개념으로도 사용되는데, 그것은 생리학적 측면과 표현법의 측면이 각각 두 가지씩 분기점을 지닌다. 또한 수행론적인 측면에서도 상반되는 두 가지 실수론이 우파니샤드에서 공존한다. 마하바라타에서 나타난 푸루샤와 아트만에 관한 기술이 큰 개념적 차이 없이 사용된다. 다만 마하바라타에서 푸루샤와 아트만을 구분하는 맥락은 기본적으로 우파니샤드의 존재-인식 분류법과 동일하다. 그리고 마하바라타의 일부 구절에서는 고전 상키야와 거의 흡사하게 아트만과 푸루샤가 지각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서술하는 부분이 있으며, 반면 요가를 통해서 지각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키야와 요가와 구분되는 사정과 관련이 있으나, 고전 상키야에서 아트만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푸루샤라는 사용한 경위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