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철학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이론을 넘어선 실천이다. 그런 실천 가운데 하나가 운명에 대해 쉽고도 상냥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영역이며 그런 자세야말 로 철학실천의 제1원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점집의 역할이 크다. 사람들은 걱정을 덜기 위해 점을 본다. 그것은 실 존적이며 돌봄의 행위다. 철학실천자들은 심려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배려로 나아가(가 가 빠짐!)야 한다. 우리의 근심 한 가운데 운명이라는 말이 놓인다. 운명은 대체로 과거명제로 쓰인다. 모든 것이 나의 업이고 응과응보란다. 운명은 대과거 다. 왜냐하면 운명은 이미 있(었)고, 지금에서야 현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운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를 위로해준다는 점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정해진 운 명이거나 신의 시련이거나 업보라고 하면 너무나도 쉽게 내 앞의 비극적인 일을 받아들이게 된다. 운명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이해된다. 그렇다면 철학이 운명을 비틀 수는 없을까? 많은 운명론은 윤리설을 설정함으로써 운명 비틀기 를 한다. 모든 것이 운명이기에 관 조하고, 절제하고, 희생하고, 하다못해 조롱이라도 함으로써 운명에 밟히더라도 지렁이처 럼 꿈틀댄다. 운명이 생명의 생로병사라면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니지만, 그 앞에서 서보 기, 사귀기, 누리기, 느끼기 를 덧붙여 감히 의지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철학이다. 운명과 운명애는 다르다. 운명은 수동적이지만 운명애는 능동적이다. 운명은 우리에게 위안을 줄뿐이지만, 운명애는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끔 한다. 그런 점에서 운 명애는 선택이다. 장자가 말했듯이, 세상은 황당 하고 맹랑 하다. 그러나 위안에 그치지 않고 선택할 때 운명은 즐거운 맞이 곧 환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