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기독교 수용의 역사성에 비해 회심을 단행한 지식인들의 사유 변화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독교 토착화과정에서 유교적 지식인들은 기독교 관련 문서 번역과 교리 전파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최병헌의 삶은 당대 유교적 지식인의 기독교 경험과 실천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의 종교 담론은 문명론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었다. 한국에서 활동한 당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과 달리 종교와 정치를 상호 보완적 관계로 파악했다. 이처럼 종교와 정치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면서도 종교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은 유교의 정치ㆍ사회적 전통과 기독교 문명론의 영향이다. 정교일치 관념은 사회적 기능을 다한 유교 대신에 기독교 수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작동했다. 최병헌이 선유활동의 명분으로 제시한 신민의 도리, 정치와 종교의 보완, 기독교 인애의 실천 등도 문명론과 정교관의 연장선에 있다. 문명론과 기독교 세계관의 접합을 확인할 수 있는 초기 저술로 『성산명경』을 들 수 있다. 대화체 몽유록 소설 형식을 차용한 『성산명경』은 자신의 개종 체험을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불도와 기독교 간의 대화는 세계 창조론, 인간 영혼론, 내세론 등으로 이어졌는데, 유교도가 기독교를 인정한 이유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기독교 문명의 힘 때문이었다. 이는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최병헌의 기독교 수용과 개종이 철저하게 서양 문명론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증거이다. 최병헌의 회심은 유교 지식체계의 균열에서 비롯되었지만 유교의 가치를 전복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았다.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확신했지만 동양 고전과 재래 학술사상의 가치에 대한 인정은, 그를 단순한 서구주의자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