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근대성의 양면성과 현대사회의 이념적 모델을 파악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다. 여기서 헤겔이 노예제를 인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구도에 어떻게 수용했으며, 어떻게 관념적으로 재구성했느냐 하는 점은 무수한 논의의 대상이다. 헤겔은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와 노예제의 공존에서 혼란을 느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겔은 ‘자유’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게 되었으며, 자유의 변증법을 전개함으로써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 전반을 성찰하는 ‘정신’의 변증법을 구상하게 되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은유를 넘어선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도 이러한 과정 때문이었다.BR 주인과 노예의 상호인정의 투쟁은 ‘시민사회’에서 원자적 개인이 무한 경쟁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시민사회의 욕망은 생존하고자 하는 자기유지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짐으로써 목숨을 건 투쟁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정립된다. 주인의 지위를 차지한 욕망은 권력욕망 또는 순수욕망의 실현으로, 노예의 지위를 차지한 욕망은 노동욕망 또는 간접욕망(매개된 욕망)의 실현으로 귀결되었다. 이 두 가지 욕망이 근대성의 틀을 유지하는 기본 개념인 셈이다. 이때 주인은 추상적 체계의 원형으로 기능하고, 노예는 근대적 개인의 원형으로서 노동하는 개인의 표상이 된다. 특히 노예는 노동욕망을 가진 개인으로서 생의 자기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생산활동과 생산체계에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편입됨으로써 현대 사회의 대중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원형적 개인이 프로테스탄티즘을 내면화하면 비로소 자본주의적 개인이 등장하게 된다.BR 헤겔이 말하는 ‘시민사회’의 욕망의 무한경쟁은 바로 부르주아의 무한경쟁을 말한다. 이는 소유하는 개인의 자유라는 근대성의 인간형을 모델화한 것이다. 여기에 헤겔은 노동하는 개인을 덧붙여 욕망과 노동의 근대적 개인을 완성한다. 욕망과 노동은 상호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일성과 비동일성, 또는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을 말한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개인이라 말하는 이념적 존재는 바로 추상적 체계를 대변하는 주인의 의식이겠다. 그러나 구체성을 상실한 추상성의 전개는 윤리적 상황을 비롯한 철학적 상황을 추상성 일변도로 만들었다. 물론 헤겔도 추상성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 체계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전개했으나 근본적으로는 구체적 추상성이라는 ‘추상적’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헤겔의 윤리학과 인륜성의 전개에서 뚜렷하게 전개된다.BR 또한 세계사의 도정을 역사철학적으로 단절/분절시켜 이해하는 것 또한 계몽의 특징이다. 헤겔이 직접 시도한 ‘철학사’ 강의 또한 서구 중심주의의 산물이며 계몽주의 시기의 산물이다. 철학사 서술에서 그리스 철학을 호출한 것도 이러한 보편주의의 요청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헤겔은 구체와 추상을 통일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제시했지만 철학적 관성에 따른 추상성의 요구로 인해 다시 서구 일변도의 근대성과 추상성으로 빠져버렸다. 헤겔 사유의 추상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식민성과 노예제의 현대적 의미를 다시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륜성을 인식론적 견지가 아니라 존재론적 견지에서 다룬다고 하더라도 추상성의 윤리학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