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선종과 인도불교 유가행중관파의 상이한 시선이 맞닥뜨린 티베트 논쟁은, 돈문(頓門)과 점문(漸門)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선(禪)수행에 관한 전통적 시선과 새로운 시선이 조우하여 끝내 소통하지 못한 선 수행 담론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논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돈(頓)이냐 점(漸)이냐의 문제보다는 양 진영의 상이한 선관(禪觀)이다. 돈·점의 문제는 선 수행을 이해하는 선종의 새로운 시선에 수반하여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티베트 논쟁은 선관(禪觀)의 문제가 주(主)/본(本)이고, 돈점의 문제는 그에 수반된 종(從)/말(末)이라 보아야 적절할 것이다. 티베트 논쟁의 초점과 의미를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선종 선사상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직결된다. 선종 선사상에 대한 학계나 교계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티베트 논쟁을 두 가지 상이한 선관(禪觀)의 충돌로 읽고, 마하연이 제기하는 선종 선사상의 정체성을 ‘이해방식과 대비되는, 또한 집중이 아닌, 마음방식의 선관’으로 포착하는 것은, 선종 선사상의 핵심과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단서로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BR 선종의 마음방식 행법으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재환각을 전제로 형성된 마음범주/계열/문법 ‘안에서’ 마음범주에 의한 왜곡과 오염을 수습하려는 모든 구도의 행법은, ‘차츰차츰/점차로/차례대로/단계적’이라 할 수 있는 개량적 개선이다(漸). 그것은 마음의 환각적 전제가 보존된 채 성취되는 향상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수준 높은 것일지라도 여전히 실재 왜곡과 오염의 범주 안에 놓여있다. 반면 그 마음범주의 지평/계열/체계/문법을 붙들지 않고 그것에 빠져들지 않는 마음국면은, ‘단박에/몰록/단번에/한꺼번에/갑자기’라 할 수 있는 ‘통째로 빠져나옴’이다(頓). 이 통째적 국면전환과 자리바꿈은 실재를 왜곡/오염하는 마음의 전제인 존재 환각 자체를 거세 내지 무효화시키는 조건이므로, 계열의 비연속적 국면이고, 범주이탈적 자리바꿈이며, 지평의 통째적 전의(轉依)로서, 돈오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 티베트 논쟁을 점문(漸門)과 돈문(頓門)의 대립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